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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하나님의 충족성 (창1:1)

본문

I. 서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도(道)이고, 인간이 그 목적에 부합해서 살려고 하는 것은 것이 덕(德)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 보존, 유지하시는 의지를 바로 도덕의지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려면 세상이 당신의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기초는 창세기 1장1절에 기초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곤 한다.


II. 첫 번째 의문


하나님께는 모자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시계는 시간을 알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었다. 인간은 뭔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만들어서 어떤 목적에 이바지하게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뭔가를 만드신 것이 아니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 세상은 영원 전부터 있었다고 해야지만 말이 된다는 억설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이 변함이 없으신데 이 세상을 창조했다가, 심판했다가, 변형시키는 것을 보면 하나님도 뭔가 당신 스스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 세상을 창조하셔야만 자신이 충족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러한 질문에 대한 말끔한 답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인간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과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 있다. ‘사랑’, ‘지식’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있지만, 그분이 가지신 것과 우리가 가진 것에는 무한한 격차가 있다. 이것을 유통적인 속성이라 부를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인간에게 없는 속성이 있다. 하나님께만 있는 고유한 속성 또는 불유통적 속성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무한성’, ‘완전성’, ‘불변성’ 이러한 것은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그림을 예쁘게 그리고 몇 만 년 전에도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 같은 것을 그렸는데, 인간에게 무언가 필요해서 그런 예술행위를 했을까? 이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을 예술로 펼친다. 이는 인간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완전성에 가깝기 때문에 예술 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모두 주로 말미암아 났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재성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당신 밖에 계신 것이 아니라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 바깥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창조를 통해 만물이 당신과 교통하시고 그 만물은 휘돌아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온다. 하나님께서 뭔가 부족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으면서 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 피조물은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에 당신 안에 있는 것이다.


III. 두 번째 의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시간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셨다. 위의 세계는 천사를 통해 당신이 직접 통치하시고, 아래 세계는 인간을 대리해서 인간이 통치하게 하셨다. 세상에 죄가 들어와 타락한 인간의 지위는 천사에 도무지 못 미치는 부족한 존재가 되었으나, 부활의 때에 다음 세상에서는 그 지위를 회복할 것이다. 세계와 시간은 첫째날 이전에 창조되었다. 첫째 날 이전에 뭔가를 창조하셨다면 시간이 없는 세계인데, 그들은 시간과 관계없는 영원성을 가지게 된다. 시간은 첫째 날 창조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첫째 날 창조 전에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해 살펴보자.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오시고, 우리의 상식으로는 처음에는 성부(1위1체) 혼자, 한 참 되에 성부 성자(2위1체) 두 분이 계셨고, 비로소 성부 성자 성령(3위1체)의 세 분이 계신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원은 초시간의 세계이기 때문에 성부는 성자보다 앞서지 못하고, 성령 없이 성부와 성자만 계시던 때도 없었다. 이것이 시간 세계와 영원 세계의 차이이다.

과거는 흘러가고 현재는 지금 있고 미래는 아직 안 왔다. 그래서 지금 현재가 지나가지 않으면 미래를 아직 안온다. 현순간의 찰나를 붙잡을 수 없다. 과거와 현재는 뒤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 작용 속에서 증명이 된다. 이렇게 설교하는 동안에도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되고 현재가 된다. 일단 흘러가고 나면 정신세계에서는 선후가 없다. 생각이 날 때 연대순으로 생각이 나는가? 시간과는 상관없이 시간을 초월하여 떠오른다.

어거스틴이 삼위일체론을 쓰던 때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삼위일체론의 결론을 알겠는데 설명이 안되어서 기도하면서 기록하던 기간이었다. 어느날 해변가를 거닐다가 어린 아이의 장난질을 하는 것을 보았다. 아이가 모래로 조그만 웅덩이를 만들어 그 바닷물을 거기에 담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때 섬광처럼 어거스틴은 “진리의 하나님이시여! 영원이신 하나님이시여! 아멘.무한히 끝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하늘나라는 시간이 없을까? 그것은 종류는 다르지만 시간계 안에 있다. 영원이 펼쳐지면서 시간이 된 것이다. 영원은 무한하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때보다 더 나중 때에 이런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창조의 뚜껑을 열어야만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 오웬은 “실로 하나님은 당신 밖에 있는 어떤 존재에 의해서 자극받거나 움직여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무한한 의지와 영원한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하필 왜 그 때였냐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그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너무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무”를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이 “무”는 없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잠재된 가능성”을 가리킨다. “있다,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기준으로 한다.


IV. 결론과 적용


창조된 모든 것은 그 위대한 창조의 목적을 가지고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신 그 하나님을 덕 입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해야한다. 무엇이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이고, 시간계에서 많은 돈, 명예, 물질, 지위 등등이 너울거리며 지나가는데,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자극해서 지나가면서 생긴 이 인상들이 우리의 지성에 끊임없는 폭력을 가한다. 이것이 인식론적인 폭력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돈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폭력을 가한다. 높아지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런 것을 떨어내는 반성과 숙고의 과정이 없다면 지성의 찌끼를 떨어내야한다.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털어내야 한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그런 묵은 때를 털어 낼 수 있게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하나님은 부패하고 잠시 있다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것들을 소유해야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이 아닌 욕망의 모든 견해를 청산하고 영원의 찬란한 빛, 박막과 같은 현재를 살고 있는 존재로서 깊이, 그 모든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야한다. 진실로 사랑하고 향유해야할 것들을 바라보아야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덕의지를 받아들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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