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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창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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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설교 제목이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새삼스럽게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이유는 그것을 알아야 이 혼돈의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갈길을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자신에 물을 때 우리는 흔히 몇 가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유아무개이다' '나는 목사이다' '나는 아버지이다' '나는 남편이다' 등등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나'인가"라고 다시 물을 때는 한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50년만에 정권이 바뀌고 나서 사람들이 특히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줄곧 여당만을 지지해 왔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야당이 여당이 되어버리자 혼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여당을 지지할 것인가? 과거 여당을 지지하면서 야당을 지독하게도 미워했는데, 그 야당이 여당이 된 지금 계속 그 여당을 지지해야만 되는가? 반대로 과거 50년간 재야에 있으면서 정부와 여당을 줄기차게 비판해 오던 사람들도 혼란에 빠졌습니다. 정권이 바뀐 지금도 계속 줄기차게 정부를 비판하는 재야세력으로 남을 것인가? 그 동안 줄기차게 여당을 지지해온 나는 누구인가? 그 동안 줄기차게 비판을 한 나는 누구인가?


한 정권이 바뀌어도 이렇게 정체성의 혼란이 오는데, 지금 우리는 한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 서서 정권이 바뀌는 것보다 더 큰 변화를 겪으면서 혼란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보 통신의 급격한 변화를 통해서 우리 생활에 여러 가지 변화가 밀물처럼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바로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와서 과거에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잘못된 것으로, 과거에는 정말 우습게 여겼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화되면서 정말 무엇이 옳은 것이고 좋은 것인지를 분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변화하는 역사에 민감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십대들의 힙합바지와 염색한 머리와 귀청 때리는 노래를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좋게 보려해도 좋게 보아지지 않는 것이 기성세대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좋아하건 말건 십대들은 그 문화를 그대로 받아 드리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구축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한평생을 함께 살던 부부가 70넘어 갑자기 이혼을 하겠다고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나이 들어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되면서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데, 이렇게 평생을 남편에게 구박받으며 살아야만 하는가? 과거에는 그 시대 그 문화가 그 부부를 꽉 얽어매어 주었지만, 지금처럼 열린 시대 열린 문화 속에서는 더 이상 그 부부를 얽어매어 주는 끈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죄인의 괴수


오늘 읽어 드린 빌립보서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앞부분에 보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바울의 모습이 나옵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습니다. 빌 3:5-6


이런 바울의 자기 인식은 주로 겉으로 나타난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나는 서울 사람이고, 유씨 가문이며, 명문대학을 나왔고, 정치 1번지인 종로구에 살며…" 등등으로 나를 인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외적인 자기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영남 사람, 나는 호남 사람, 나는 기호 사람, 나는 이북 사람이며, 나는 경기고등학교, 목포고등학교 출신이며, 나는 삼성맨, 나는 대우맨이다. 나는 국회의원, 나는 장관, 나는 판사, 나는 교수'등 주로 이력서에 쓰는 것이 대체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나'인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할례 받은 사실이 중요했으며,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으며, 교회를 박해하는 열성이 돋보였으며,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가치관이 변하였습니다. 과거에 자랑스러웠던 것들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 모든 것을 분토(糞土)처럼 버렸던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자신은 과거에 "훼방자(毁謗者)요, 박해자요, 폭행자(暴行者)"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발견한 '나'는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갖게되는 첫 번째 자아 인식(自我認識)은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자아 인식은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과거의 모든 것은 무너져 버리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내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바리새인은 자기가 한 일들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기도를 드린 데 반해 세리는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하였는데, 예수님의 결론은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은 바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나는 그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제대로 알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피조물인데, 타락하여 죄인이 된 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나의 발견은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나의 세계는 넓어진 것입니다. 이 땅의 짧은 삶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로 나의 세계가 넓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가치관(價値觀)이 달라지고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나'를 올바로 아는 사람


창세기에 나온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요셉이 어떻게 그 형제들과 달랐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는 한 때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노예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후에 그가 바로의 꿈을 해몽해 주고 총리(總理)가 되었지만, 절대 권력을 가진 총리로 자신을 인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구로 늘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혹시 요셉이 자기들에게 보복을 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형들이 요셉을 찾아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때 요셉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자기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경우 자기가 마치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할 것처럼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가 총리라는 외적 신분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부름 받은 한 일군으로 자신을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서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어 보게 하였을 때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당신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라고 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의 길을 곧게 하여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자기를 생각한 요한은 결코 그 이상이 되려고 하지 않고, 철저하게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서만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철저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하면서 은근히 시기심을 나타내자 그는 제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요 2:29-20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이런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모르니까 될 자리 안될 자리 가리지 않고 마구 덤벼듭니다. 정치가들은 대권 도전한다며 너도나도 모두 대통령이 되려 합니다. 그걸 닮아서 우리 교단에서는 너도나도 다 총회장이 되겠다고 나섭니다. 자아 인식이 뚜렷하지 못한 사람들,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사람들이 마구 나서서 정치 지도자가 되고 교회 지도자가 되기 때문에 신념도 없고, 일관성도 없이 나라 정책이 흔들리고, 교회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누구인지 가장 분명하게 알고 행동하신 분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일곱 번 예수님의 "나는 무엇무엇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포도나무이다"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임을 분명하게 나타내 주는 말씀이다. 그런가 하면 메시야인 자기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은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막 10:45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섬김을 받으려 하신 것이 아니라 섬기시며 자기 목숨을 대속물(代贖物)로 내주러 온 자기의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신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고난의 종이라는 모순된 자아 인식을 잘 소화하셨던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그 피조물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는 고난의 종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모순을 잘 극복하시면서 철저하게 고난의 종으로서의 자기 사명을 완수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깨닫게 되고, 그러면 지역적 갈등이나 학력의 차이나 빈부의 차이, 혹은 사회적 지위의 고하, 출신 성분에 매이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며 확신과 소망 가운데서 자기 개발을 위해 더욱 힘쓸 것입니다.



자아 형성을 위한 전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다음 좀더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노력하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3:10-11


사도 바울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기 개발을 위해 즉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계속 노력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나'를 자라게 하며 든든히 하며 완전케 하기 위하여 계속 노력한 것입니다. 바울의 노력은 단순히 생각이나 기도 속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만나 그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자기를 개발하고 그리스도를 목표로 그를 닮아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기 정체성의 혼돈은 새롭게 형성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를 확립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목표를 그리스도에게 두고 그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려 하였던 바울처럼 우리도 목표를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에 두고 노력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치열한 노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새로운 자아를 얻었지만, 거센 세파에 닦여 그 자아가 자라지 못하고 짓눌려 있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뚜렷한 가치관이 없고,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껍데기 신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급격한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우리도 길을 잃었고, 뚜렷한 역사의식 없이 이리저리 표류(漂流)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고 세기가 바뀌며 문화가 바뀌어도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 나의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되면 나의 주체는 확립되어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은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를 확립하는 기간입니다. 생각 없이 물결치는 대로 떠내려가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나를 더욱 굳게 하고 든든히 하여 이 시대의 혼돈 속에서도 흔들리 아니하며 목표를 향한 힘찬 전진을 계속하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다지는 기간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시대가 바뀔 때마다 주관 없이 이리저리 떠돌고, 갈 자리 안갈 자리 가리지 못한 채 마구 아무 데나 뛰어드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만나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떠밀려 가는 자가 아니라 이 시대를 앞서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닮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모든 열정을 쏟아 붓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목적 의식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며, 창조적인 교회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진틀 속에 걸린 그리스도를 멍청하게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내 삶 속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 그를 배우며 그를 본받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사순절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앙으로 이 혼돈의 시대를 헤쳐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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