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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의 고백 (롬1:7-14)

본문

신앙생활을 하면서 은혜받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종의 가슴을 설레이게 감명을 주었던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제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어느날 밤 종소리 따라 교회에 가서 처음으로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저는 이 말씀에서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산다는 것으로 인생관이 설정되었습니다.

둘째,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눅 17:10)

예수 믿고 부모님을 섬기면서 효자 되고 싶은 마음으로 감명이 된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7-10)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저는 이 말씀이 그토록 은혜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감사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익한 종의 자세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충성을 다 한 후에도 할 일을 했다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나는 빚진 자다(롬 1:14)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 가서 목회를 하는데 여름철 어느날 나무 그늘 아래서 사도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라고 말한 로마서를 읽다가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저는 땅에 무릎을 꿇었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이 종은 빚진 자입니다. 주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부모님에게 빚진 자입니다. 불효한 자식입니다. 내 조국에 빚진 자입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빚진 자입니다. 교인들을 대할 때마다 빚진 자입니다. 온 지역 사람을 쳐다보아도 빚진 자입니다.”

‘너는 빚진 자다’ 하는 음성이 늘 메아리쳐 왔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세 단계의 변화가 있습니다.

첫째, 겸손해집니다.

은혜를 받으면 겸손해집니다. 모든 것이 은혜요 자기가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받고 겸손해지는 것이 큰 축복이나 축복을 받고 교만해지면 망합니다. 모든 축복을 받고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으면 겸손해집니다.

둘째,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행복하게 됩니다. 은혜받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행복해지고 삶이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행복하게 됩니다. 성도는 은혜를 받을수록 좋습니다.

셋째, 빚진 자가 됩니다.

이 단계는 미치는 자가 됩니다. 역사를 이끄는 창조적 소수는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빚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사랑하는 자는 빚쟁이로 만들어 재산, 재능, 시간, 생명까지 다 빼앗아 갑니다.

믿음의 사도인 바울이 지녔던 빚진 자의 심정은 예수 사랑에 미친 심정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고난과 험한 길을 걸으면서도 복음을 전해야만 했던 것은 빚진 자의 심정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헬라인, 야만인, 어리석은 자, 지혜로운 자 모두 이방인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이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을 갖는 것은 성령의 감동입니다.

            주의 귀한 은혜받고 일생 빚진 자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이 말씀 속에서 그의 깊은 신앙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높은 인격이 엿보입니다. 그리고 강렬한 사명감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터너(Turner)라는 분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기억하라 네가 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후에는 연약한 그릇 일생을 통하여 죄인, 그리고 성공의 절정에 선 때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하늘과, 땅과, 양친에게 빚진 자라”

왜 바울은 자신이 이토록 빚진 자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말은 빚 많이 졌다는 말입니다. 은혜 많이 받은 것을 큰 능력이나 신비한 은사나 체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내 자신의 입장에는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선물이요, 은혜지만 받는 우리에게는 빚입니다.

내가 많은 자녀들 중에서 부모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면 이는 곧 부모님에게 빚을 많이 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베푸시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철저하게 빚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그에게 은혜는 커지고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 것이 됩니다.

         깨닫는 은혜는 크다.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은혜는 은혜를 깨닫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나의 나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잘나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혜로 이렇게 되었으니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고 할 말이 있다면 하나님께 빚 많이 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5절)

당시에 많은 주의 종들이 자기 자랑을 하였습니다. 학벌, 문벌, 인물자랑이었습니다. 사실 나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너희보다 낫다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라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지만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약점 위에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존하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나타남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어도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면 그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고 했습니다.

누가 은혜를 헛되이 받는 자입니까? 은혜를 빚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텐데 교만으로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겸손한 은혜

만약에 우리가 받은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로 믿는다면 결코 우리는 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건강하다고 신체적으로 불우한 사람을 무시합니까 나는 물질이 부요하다고 가난한 자를 무시하려고 합니까 나는 학벌이 좋고 문벌이 있다고 남을 무시하고 있습니까 나는 영적으로 더 깊은 신앙인이라고 남을 무시합니까 모든 것을 다 은혜로 받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땅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보다 공부를 많이 하였고 출세를 하였기에 더 잘살 권리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했고 출세했으므로 남들보다 더 많이 봉사할 의무가 있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빚을 받아내려는 채권자의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그 사회는 황폐해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빚진 자로 받아들일 때 그 사회는 살찌고 번영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빚진 자

사도 바울이 일생동안 빚진 자의 간절한 심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있으니 사랑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솟아오르고 있었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이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자신을 빚진 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건강할 때 다른 친구들의 약함을 보면서 자랑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봉사할 의무와 빚으로 느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현재의 행복한 삶에 부담을 느끼고 무엇인가 갚아야 할 의무감이 솟아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이 생각이 그를 아프리카에 건너가게 했고 세계 인류의 괴로움의 한 몫을 지도록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

사도 바울은 일생동안 빚진 자이기에 종의 심정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노예제도의 비참한 것을 보았으면서도 자신을 종으로 부르기를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은혜에 감사해서 스스로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바울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빚진 자로서 스스로 사랑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되기 오래 전에 있었던 일화입니다.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으며 살던 한 흑인 노예가 병약해져서 일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채찍으로 그 노예를 피가 나도록 내리쳤습니다. 길을 가다가 이 광경을 목격한 백인 교수는 그 노예를 두 배가 넘는 값을 지불하고 집으로 데려와 그의 상처를 싸매주며 정성스레 돌보아 주었습니다. 며칠일 지나 그의 몸이 회복되자 교수는 이미 몸값을 치루었으니 더 이상 노에가 아니므로 돌아가 자유인답게 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감동을 받은 흑인 노예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포악한 주인의 손에서 나를 건져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시고 나를 자유인되게 하셨습니다. 자유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자유를 당신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이 집에 살면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교수를 정성껏 섬겼습니다. 교수는 식물학 전공 학자로 연구차 태평양의 한 외딴 섬에 갔습니다. 종은 거친 숲을 헤치고 앞서 가고 교수는 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숲 속에서 교수는 그만 독사에 물려 쓰러졌습니다. 이때 종은 독이 교수의 온 몸에 퍼지기 전에 자기 살을 칼로 베어 독사에 물린 상처에 가져다 대어 독이 자신의 살로 빨라 올라오도록 하였습니다. 교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을 수차례 베어낸 종은 심한 출혈로 인해 쓰러져 죽ㄱ 말았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은 교수는 자신의 곁에서 피흘려 죽은 종을 보았습니다. 그는 죽은 종을 껴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를 위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 주었습니다. 그 비석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주인을 살리고 죽은 충성스러운 참된 자유인!”

자유인이 되었으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청해서 주인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진 빚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노예는 교수를 살리고 죽어갔지만 그는 빚진 자로서 죽음을 선택했으며 행복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참 자유한 삶을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빚진 자는 희생이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종의 생애로 그렸습니다. ‘하물며 자기같은 죄인이 어찌 그 크신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주 예수께 빚진 것이 한없건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교회마다 보내는 서신 첫머리 인사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영광스럽게 밝히고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희생이 없습니다. 리빙스턴은 일생동안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말년에 리빙스턴은 자신이 살아온 봉사의 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내 일생의 대부분을 아프리카에서 보내며 치른 희생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진 큰 빚, 결코 갚을 수 없는 그 빚의 극히 일부를 갚은 것에 불과한 것이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건강한 활동 속에서 그 자체의 가장 최고의 보답, 즉 선한 일을 행한다는 자각, 마음의 평온, 내세에 있을 영광스러운 운명에 대한 밝은 희망을 가져다 주는 것이 희생입니까? 내세에 우리 안에 또 우리를 위해 있게 될 영광에 비하면 이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안다면 이렇게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에 빚진 자로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빚진 자로서 사랑의 강권함을 받는 심정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랑의 빚,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은 로마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명감에 불탔던 것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

예수님은 빚을 아는 자에게는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빚은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입니다. 내가 받은 빚이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내 안에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저에게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 주라 하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갚아야 합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빚진 자는 빚을 진대로 갚아야 합니다. 물질로 진 빚은 물질로 갚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진 빚은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은혜로 진 빚은 은혜로 갚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은혜로 진 빚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로마교회에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갚아야 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은 예수였습니다. 예수 복음과 예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을 갚지 않고는 화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마땅히 갚아야 할 빚 때문에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19-20)

하고 또 하여도 부족한 일, 하고 또 하여도 더하지 못하여 마음 아픈 일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도하는 일, 또 하나는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일, 또 하나는 전도하는 일입니다.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하셨는데 그 한가지 일은 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인도에서 온 어느 선교사는 눈물로 호소다 이런 선교 표어를 걸었습니다. 그것은 'go or send'(가라 그렇지 않으며 보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라, 복음 들고 가라, 선교사로 가라, 갈 수 없거든 보내라’ 선교사를 보내든지 선교비를 보내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선교는 빚진 자의 최상의 의무입니다.

한국교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전 인구의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통계를 내놓을 정도로 부흥하여 세계적으로 소문이 난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축복을 누리게 된 배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피와 눈물과 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27세에 선교의 비전을 품고 영국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에 오자마자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어버린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는 한 가지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 중국 한 모퉁이에 붙어있는 한반도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백성들이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으며 복음을 들은 일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말로 된 성경책을 배에다 싣고는 대동강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때는 대원군이 한창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때로 카톨릭 신자들을 잡아죽이던 살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야소) 소리만 내어도 세상 구경을 다시는 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성경을 전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자 우리 관군들이 그 배에 불을 질렀고 드디어 그는 강변으로 끌려 내려와서 칼에 맞아 순교를 했습니다. 순교를 당하는 그 순간에도 자기 목을 치는 사람에게 성경을 주면서 그것을 읽어보라고 말했습니다. 그 성경을 받아든 그 사람이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토마스라는 젊은이의 피가 그 강변에 뿌려졌기에 그 피값으로 인해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렇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양화진에 가면 비석이 많이 서 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세기 전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었거나 잘 적응하지 못해서 죽은 어린 아이들의 무덤, 선교사 부인의 무덤,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젊은 선교사들의 무덤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무명의 선교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교회가 있고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빚진 자 의식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희생 없이 생명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희생 없이 지옥으로 가던 영혼이 천국을 향해 돌이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도 희생하셨는데 어떻게 우리의 희생 없이 전도가 되겠습니까?

얼마 전 저는 감동적인 소식 한 가지를 들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최근에 북한에서 굶주림에 지쳐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국경을 넘기만 하면 복음을 듣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거짓말에 속아온 사람들인데, 이제는 배까지 고프니 얼마나 그 영혼이 갈급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회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값없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축복을 가슴 가득히 담게 되자 그 흥분과 행복을 도무지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조직을 결성했는데 그 단체의 목적이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전사들의 수칙’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첫 번째가 이런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대받게 되어 있다. 천대받는 그것이 긍지요, 기쁨이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오한다.“

북한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오겠습니까? 어디에 그런 담대함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들이요, 비겁한 사람들이요, 배가 고파 못견뎌서 사선을 넘어온 사람들이요, 빵만 주면 다 해결될 것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예수 모르는 자기 동족 때문에 생명을 걸고 다시 사지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바뀐단 말입니까? 성령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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