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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감(한경직목사) (롬1:8-17)

본문

  『다 내가 빛 진자라』여기 부채자의 의식 혹은 간단히 채무(債務)감에 눌린 분이 있습니다. 그는 곧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채무 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무슨 빛을 그렇게 많이 졌습니까? 돈을 많이 졌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빛입니까? 돈 이외에도 빛이 많습니다. 신령한 빛이 있습니다. 이제 그의 채무 감을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의 채무 감에 대한 내용을 생각하여 봅시다. 사도행전 九장 二十二절, 二十六절을 읽으면 거기에 사도 바울이 어떻게 다메석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개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본래 맹목적인 청년 바리새인으로서 처음에 기독교를 핍박하여 많은 예루살렘 신자들을 괴롭혔고, 다메석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잡으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석에 거의 가서 홀연히 밝은 빛이 두루 비침과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대하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늘에서 보이신 것, 곧 복음을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곧 이방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라 함은 이방인 전체를 의미합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는 헬라인은 문화인의 대표요, 문화를 모르는 이들은 다 야만인으로 여겼습니다. 지혜 있는 자 역시 교육을 받은 이를 의미함이요, 어리석은 자는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다메석 도상에서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을 뿐더러 전 이방인에게 복음 전도의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친히 기록한대로 그는 본래 훼방 자, 핍박 자, 포행(暴行)자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를 사하실 뿐더러 이방의 사도직을 맡겼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을 생각할 때에 언제나 이 영적 채무 감에 눌림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 로마서에서도 그는 이방인,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이런 표현을 하였습니다. 사실 빛이란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빛은 마음이 있으면 갚고, 마음이 없으면 안 갚는 것이 아닙니다. 빛을 졌으면 언제나 꼭 갚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전파에 대하여 꼭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九장 十六절에는『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하였습니다. 이 강한 채무 감은 그로 하여금 일생을 통하여 복음 전파에 온전히 헌신케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전파를 위 하여는 어디나 가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험한 길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넓은 바다 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느 때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였습니다. 그는 어디서나, 회당에서나, 거리에서도,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또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실로 그는 이 영적 채무 감에 눌려 일생을 살고 또 죽었습니다.

  둘째는, 사도 바울 뿐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은 누구나 다 이 영적 채무 감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채무 감 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다 빛을 많이 졌습니다.

  첫째로 먼저 우리는 다 하나님께 많은 빛을 졌습니다. 일월성신, 산천초목, 대자연계를 비롯하여 우리 일상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빛을 지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사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물로 우리에게 그저 주셨습니다. 그리고『말로 다 할 수 없는 선물』곧 그리스도까지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많은 죄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영과 육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한 비유에 있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다 문자 그대로 일만 달란트의 빛을 진 종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선 하나님께 대하여 다 빚진 자들입니다. 이 빚을 만분지일이라도 갚아보려는 생각을 하여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먼저 채무 감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이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다른 사람에게도 빛을 지고 삽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작은 핏덩이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다고 하는 것은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빛을 졌습니다. 아버지의 빚을 졌습니다. 의사의 빚을 졌습니다. 간호원의 빚을 졌습니다. 먹을 것을 생산하기에 수고하는 농부의 빚을 졌습니다. 학교에 가서는 선생들의 빚을 졌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주일학교 교사들의 빚을 졌습니다. 현재에 사는 이들에게만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빚도 많이 졌습니다. 과거의 많은 과학자, 철학자, 발명가, 신앙의 선배, 애국자,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생각하여 볼 때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사는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 채무 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셋째로 나는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나의 과거를 잠깐 회상하여 보았습니다. 부모님에게 진 빚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나기 三, 四년 전에 우리 동네에 작은 농촌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듣는 대로 그 교회는 초대 선교사 가운데 하나인 마 목사가 와서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 교회에 나가 찬송을 배우고 성경을 배웠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교회를 세운 마 목사와 그 교회로부터 진 빚을 다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 교회에서 진광학교란 작은 국민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글방 곧 서당에 가지 아니하고 학교에 가서 기독교 교육과 신문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와 그 때의 선생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리고 그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정주 오산학교에 갔는데 이 학교 역시 내가 세운 학교는 아니고 그 때에 애국지사인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웠고, 역시 애국적 교육가인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철저한 기독교 교육을 시켰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평양에 있던 숭실대학에 가서 공부하였는데 이 학교 역시 내가 세운 학교가 아니고 외국에서 오신 선교사들, 곧 베위량, 마포삼열, 나도래 같은 이들이 세우고 철저한 애국적인 기독교 교육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가서도 엠포리아 대학, 프린스턴 신학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운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이 세웠습니다. 나는 그저 가서 공부만 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빚을 그들에게 졌는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실로 나는 빚을 많이 진자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내가 중병에 걸렸을 때에도 내가 세우지 않은 병원에서 二년간이나 무료 치료를 받았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 많은 빚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 후에 한국에 돌아와서 평양에서, 신의주에서, 그리고 이 서울에서 지내온 과거 四十년간의 생활을 회고할 때에 내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진 빚을 생각하면 실로 태산보다도 높아 무엇으로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배당 위에 새길 성경 말씀 두 절을 택할 때에 하나는 요한 복음 三장 十六절이요, 다른 한 절은 시편 一백一六편 一二절입니다. 여러분 그 구절을 기억하십니까?『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사실 나는 빚진 괴수입니다.

  넷째로 여러분 나만 이렇게 빚진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 역시 과거를 회상하면 다 이렇게 빚진 자인 것을 스스로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빚을 많이 진자들입니다.

  셋째는 이렇게 채무 감이 있는 이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빚을 갚기 위하여 그 일생을 전도와 봉사에 바쳤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나 교육이나 봉사에 힘쓰는 것도 이 빚을 갚으려는 동기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왜 남에게 전도를 해야 합니까? 내가 남의 전도를 받아 구원을 얻은 까닭입니다. 내가 왜 교회학교에서 어린이들을 잘 가르쳐야 합니까? 그것은 역시 다른 이들에게 어렸을 적에 배운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개척 교회를 세우고 도와주어야 합니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도 역시 일찍이 작은 농촌에서 은혜를 받은 까닭입니다. 우리가 왜 학교를 세우려 교육사업을 도와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도 역시 일찍이 남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한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외국에도 선교사를 보내야 합니까? 그것은 외국의 교인들이 일찍이 우리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어 복음을 전파한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특별히 북한 전도를 힘써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일찍이 북한에서 은혜를 받은 까닭입니다. 다시 말하면 빚진 자들은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빚은 꼭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연말은 빚을 갚는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실 이 영적 채무 감은 인격과 신앙의 척도입니다. 인격이 고상할수록 이 채무 감이 강합니다. 신앙이 독실할수록 이 채무 감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헬라인이나 야만이나 나는 빚진 자로라』『내가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효자입니까? 부모의 은혜를 깨달아 이 채무 감에 눌린 이들입니다. 어떤 이가 애국자입니까? 국가의 은혜를 깨달아 이 채무 감에 눌린 이들입니다. 어떤 이가 제일 봉사를 많이 합니까? 하나님과 사람에게로 받은 은혜를 깨달아 이 채무 감에 눌려 사는 이들입니다. 누가 전도를 제일 열심히 합니까? 바울과 같이 이 복음의 채무 감에 눌려 일하는 이들입니다. 이렇게 이 채무 감은 전도와 봉사의 척도가 됩니다. 채무 감에 눌려 일하는 이들은 원망이 없습니다.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하여 합니다.

  예레미야 같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려면 그 속에 불덩이가 있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채무 감에 눌려 일하는 이들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합니다. 수고를 아끼지 아니합니다. 오직 기쁨과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이 기쁜 성탄 계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이 채무 감에 불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972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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