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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 하는 소금이 되는 성도 (막9:3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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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 하는 소금이 되는 성도 (막 9:38-50)




오늘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많은 교우들이 고향을 찾아 떠났지만 우리 남아 있는 자들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게 됨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모님을 찾아 오셔서 함께 예배드리는 가족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추석을 맞이하면서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제목이 3가지입니다.


하나는, 고향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잘 다녀올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국토해양부는 이번 명절에 이동하는 인구를 2925만 명으로 예측하고 특히 추석당일에는 609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답게 3천만의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많은 사고도 일어나게 마련인데 우리 교우들이 잘 다녀오기를 다시 한 번 기도합니다.


둘째는, 우상에게 절하는 죄를 범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추석 감사예배 주보에 만들어드렸습니다.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대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가, 가족들과 화목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끼리 화목하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추석명절을 잘 지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별로 기분이 좋지 못한 모습으로 명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화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절을 지내고 나서 불화가 더 깊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길정도입니다.


가족들끼리 더 화목해지는 이번 명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왜 명절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화목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화가 더 깊어지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서로가 소금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고 말씀하십니다.(50절)


예전에는 소금을 두고 언약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것을 일명 소금언약이라고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소금을 두고 언약을 하는 이유는 소금이 우리 삶에서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의 소금으로 표현했겠습니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소금은 무려 1,400여 가지의 용도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소금의 중요성은 예전이나 오늘이나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소금이 인간 삶에서 이렇게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언약도 중요하니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금을 두고 언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소금을 두고 주님은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금이 중요한 것처럼 서로 화목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왜 화목해야 합니까?


 


* 유명한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 몇 명의 소년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방문했습니다.


마침 다빈치는 조용한 가운데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화판 더미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예민한 그의 작업이 방해를 받아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는 붓을 집어던지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에게 화를 내며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소년은 울면서 화실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다빈치는 다시 붓을 들고 예수님의 얼굴을 완성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창조성과 영감은 화를 낸 후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울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미안하구나. 내 말이 너무 지나쳤구나. 나를 용서해다오. 너는 그저 화판에 걸려 넘어진 것뿐인데. 나는 공연히 화를 내어 나의 생명 안에 흘러드는 하나님의 영감을 막았구나. 나와 함께 다시 화실로 들어가지 않겠니?"


그런 후 그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화목 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화목 하는 삶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화목하신 하나님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우리 성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추석에 소금으로 서로 화목 하는 명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서 우리 교우들의 삶속에서 소금으로 서로 화목 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가 소금으로 화목하여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형제와 형제간에, 이웃과 이웃 간에, 친구와 친구 간에 소금으로 서로 화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화목의 직책을 어떻게 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처럼 ‘너희 속에 소금을 두어 서로 화목’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나 중심의 삶을 살지 말고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먼저 등장하는 것은, 요한이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함으로 금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낯선 기적 수행자들이 누구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이 누구이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제자들을 따르지 않았는지 궁금한 대목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들이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여기에서 복음서 기자는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금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금했다고 하는 요한의 말에 주님은 그들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같은 입장에 있는 요한과 주님이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인데요,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은 자기중심적인데 비해 주님은 자기중심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말을 보면 우리를 따르지 아니함으로 금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를 따르지 아니함으로’ 요한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우리를 따라야 한다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를 따라야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따르지 아니하면 다 원수고 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따르지 않아도 적이 아니고 원수가 아니고 우리를 위하는 자들이라고 넓고 관용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분명 자기중심적인 사고 때문입니다. 자기한테 잘해야 그것이 좋은 것이고 자기 마음에 들어야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자기한테 잘하지 못하면 그것은 나쁜 것이고 원수고 적입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잘해도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 노동시인 박노해는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고, 화해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쁜, 나뿐인 사람”이 됩니다. 


 


* 우리가 잘 알고 실제로 느끼는 이야기입니다만 장모님이 시집간 딸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녁밥을 먹고 난 후에 사위가 얼마나 잘하는지 앞치마를 두르더니 설거지를 하고 딸은 과일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설거지를 하고 난 후 빨래까지도 사위가 하고 있고 딸은 계속 TV만 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참 사위가 잘한다, 이렇게 착한 사위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면서 칭찬을 합니다.


며칠 후 이 어머니가 아들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가서 보니 똑같은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자기 아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며느리 앞에서는 뭐라고 할 수가 없어서 나중에 아들을 조용히 불러서 야단칩니다.


‘야 이놈아 너는 자존심도 없냐? 남자가 무슨 설거지를 하냐? 빨래가 남자가 할 일이냐?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 똑같은 상황이지만 왜 이렇게 기분이 다른 것일까요?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이든지 내가 기준이 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남을 이해할 수 없고, 마음을 넓힐 수 없고, 자기 집착에 빠져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좋으면 좋고 내가 나쁘면 나쁜 것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살아가면 절대 화목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원수를 만들어 불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아도 얼마든지 옳을 수 있고 좋을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지 않아도 얼마든지 주의 일을 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일 수 있습니다.


우리 교인이 아니어도 주님의 귀한 일꾼일 수 있고 나와 생각이 달라도 얼마든지 주님께 사랑받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하고 내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살아갈 때 화목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작은 자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42절에서 주님은 엄하고 강한 톤으로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그렇게 실족하게 하는 죄를 손이 범하였다면 손을 찍어 버리고, 발이 범하였다면 발을 찍어 버리고, 눈이 범하였다면 그 눈을 빼어 버리라고 아주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는 손이 없고 발이 없고 눈이 없는 장애자들만 가득할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그만큼 실족하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고 그런 일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화목 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작은 자들을 무시하기 때문이고 하나라고 등한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화목하기 위해서 우리는 작은 자들을 존경해야 하고 하나라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나아만은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한 이름 없는 계집종을 실족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를 소중히 여겼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 결과 불치의 나병을 고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 없는 한 계집종을 실족시키지 않음으로 온 가족이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과도 화목하게 되었고 이웃 나라 이스라엘과도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에게 가장 작은 자 하나가 누구입니까?


가장 작은 자 하나라고 무시하여 실족시키는 사람은 없습니까?


혹시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을 무시하고 실족시키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그들을 실족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린 자녀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자녀들을 소중하게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 그리고 집을 나간 탕자와 같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작은 자들을 실족시키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어려움을 당한 자, 병든 자를 돌보고 도와주며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어떤 유명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일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이 선비는 큰 나라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왕이 그에게 전쟁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침 그 날이 추석처럼 보름달이 돋았던 모양입니다. 선비가 달을 가리키면서 “이 나라는 만월 같고 저 나라를 초승달에 불과한데 굳이 작은 나라를 칠게 무엇입니까” 하면서 전쟁을 하지 말 것을 권하자 왕은 흐뭇하여 군대를 거두었습니다.


후에 선비가 작은 나라로 건너가자 그곳의 왕이 우리가 초승달밖에 안되느냐고 따졌습니다.


선비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름달은 기울기 시작하지만 초승달은 지금부터 점점 커져갑니다. 왕의 나라가 앞으로 크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 왕도 역시 흐뭇하여 무기를 놓았다고 합니다.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지 않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과 화목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소금의 맛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50절 말씀에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고 했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는 말씀은 소금처럼 살아가므로 화목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소금이 그 중요한 역할을 다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녹아서 조용히 말없이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맛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화목 하는 것도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소금이 되어 조용히 녹아 없어질 때만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녹아 없어지는 소금은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님처럼 수고하고 희생이 될 때 우리 가정이 화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맛을 내고 섬기는 생활을 할 때 우리 직장이 우리 교회가 화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겸손하고 내가 십자가를 지고 내가 손해 볼 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살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화목하지 못할 이웃이 없는 줄 믿습니다.


 


* 크리스티나 로제티라의 “나의 선물”이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요?/ 나는 가난합니다.


내가 목자라면/ 어린 양 한 마리를 드릴 텐데, 내가 박사라면/ 내 본분을 다할 텐데,


그러나 내가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나요?/ 내 빈 마음을 드리렵니다.


 


이 시는 여기에서 끝납니다만 우리가 한 두 행을 더 보태 이렇게 완성하면 어떻겠습니까?


 


(반복) 그러나 내가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나요?/ 내 빈 마음을 드리렵니다.


빈 마음 바닥에 쌓여있는 소금을 드리렵니다.


거기에서 녹아내린 화목을 다시 올려 드리겠나이다.


소금이 녹아내릴 때 화목이 생깁니다.


화목이 녹아내릴 때 행복이 생깁니다.


행복이 녹아내릴 때 하나님의 나라가 생기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결언


화목하게 하는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너무나 중요한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다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중심으로 살지 마시고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 중심으로 살아갈 때 화목의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시키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이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소금처럼 맛을 내며 나를 희생할 때 이 화목의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이번 명절이 화목 하는 명절, 화목 하는 가정, 화목 하는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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