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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삼열 목사1(Samuel A. Maffett, 1864-1939)

최고관리자
2020.06.18 00:33 1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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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미국 인디아나주의 매디슨에서 태어나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앙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란 모펫은 1888년 당시 보수파 신학교로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한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26세가 되던 다음해1889년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조선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18901월 서울에 도착했다. 

 

이미 서울에 와있던 선배 선교사들의 지도아래 현지훈련을 받으며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예수교학당’ (경신중학교)의 교육사역을 하던 그는 만주의 로스 목사와 황해도의 첫 조선교회인 소래교회, 조선인 조사 백홍준, 서상륜 등의 활발한 선교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서북지역선교에 관심을 갖게됐다.

 

그는 6개월간의 한국어 연수교육을 마친 후 18908월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나 평안북도 의주을 거쳐서 황해도 소래를 방문하였으며 다음해 제2차 전도 여행 때에는 만주의 로스 목사까지도 만나보았다. 그는 현지를 직접 방문하면서 서북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선교계획을 세웠으며 1893년의 제 3차 전도여행을 통해 토마스 목사가 순교한 평양을 자신의 선교중심지로 확정하였다.

 

서도(서도)의 개척자

여기서 서도라 하면 황해도와 평안도를 가리킨다. 모펫(Maffet) 목사는 이 서도의 복음의 개척자이며 평양의 복음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교육 기관으로는 숭실대와 평양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의 선견지명(선견지명)

모펫 목사가 평양에 온 것은 1887년이었다. 그때는 토지 등 부동산 등록도 없던 때였는데 평양시의 지리적 형태로 보아서 대동강 능라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장대현이라는 높은 언덕이 아주 선교를 위한 요충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그곳은 천주교에서 경계를 세워 자신들의 영역임을 표시해 둔 상태였다. 이것이 법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간다면 법적인 소유권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모펫 목사는 서둘러 한국인 한명을 수소문해서 돈을 주어 그 안에 집을 짓고 등기 작업까지 마치게 한 후에 다시 자신이 그 집을 구매하여 법적인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넓은 대지를 법적으로 소유권을 얻어 서도의 모 교회인 장대현 교회와 숭덕학교를 세웠다.

 

바로 이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강서의 탄포리교회(灘浦里敎會), 청산포교회(靑山浦敎會), 대동군의 태평(太平), 외리교회(外里敎會), 중화군의 읍내교회(邑內敎會) 등 여러 교회가 파생, 발전하여 서북계 신앙의 발상지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또한 모펫 목사는 숭실중학교, 숭실대학교, 신학교를 세워 한국 교회의 기초를 닦았다. 그뿐 아니라 숭신성경학교, 숭덕학교, 숭의녀학교 등을 세워 남자 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교육의 혜택을 받도록 하였다. 또한 교육을 받지 못한 노처녀나 과부, 만학들을 위해선 숭현학교를 세워 학교 연령이 지난 부녀자들의 교육도 시켰다. 정규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를 뿐 아니라 정규 교육을 못 받은 이들 위해서 만학일망정 공부하여 교회에 크게 기여한 이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농한기에는 학년별 성경학교를 수시로 개학하여 농촌 평신도 교육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널다리 골의 모펫 목사

 

대동문 안에 널다리 골이라는 동네가 있다. 모펫 목사는 처음 평양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기와 집을 얻어 거주하였다. 평양 사람들은 처음 보는 파란 눈의 흰 서양인을 구경하러 떼로 모여 들었다 한다. 그 눈으로 정말 보이는가 해서 눈 앞에다 손가락을 대면서 꼬불거리기도 하고 뱅뱅 돌리는 일도 있었다 한다.

처음에는 모펫 목사 혼자 조선 땅에 들어왔고, 얼마 후 가족이 조선 땅을 밟았는데 철로가 황주까지만 연결되어 그 곳까지는 기차로 와서 거기서 부터는 말을 타고 평양에 들어와야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양인을 위협하려고 황주까지 와서 그에게 돌을 던져 그 이마를 깨져 그 흉터가 이마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모펫 목사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 중에 길선주 목사의 아버지와 평양신학교 제일회 졸업생인 이기풍 목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4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평양 서대문 거리에서 기역자로 서평양 가는 거리가 뚫려 있었는데 그 길이 경창리 길이다. 이 길 좌우에 서평양을 향하여 가는 방향으로는 오른쪽에 서문밖 큰 교회(2000) 그리고 좀 지나서 평양신학교 그리고 이어서 숭신 성경학교, 숭의녀학교 그리고 선교목사 사택들 그 건너편으로 사택들, 외인 학교, 서대문으로 오면서 숭실대학교, 중학교들이 즐비하게 들어 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 곳에 모펫 목사의 선교 40주년을 맞아 모펫 기념관이 세워졌다.

널다리 골에 외국인으로 들어와 숱한 놀림감과 위협과 박해도 있었었는데 경창리 길 좌우 1Km안에 교육기관과 선교사 사택, 교회와 학교로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모펫 목사가 한국 선교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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