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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삼열 목사2(Samuel A. Maffett, 1864-1939)

최고관리자
2020.06.18 22:30 1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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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모펫 목사의 교회당 터 

모펫 목사는 가는 곳마다 위치가 그들의 중심이 되어질 곳에 땅을 사두곤 하셨다. 구 한국시대라 엽전을 사용할 때에 엽전 몇 푼씩 주고 땅을 곳곳에 사두었다. 후에 그곳에 믿는 사람이 생기고 교회당을 짓게 될 때가 되면 그 준비해 둔 땅이 그 동리엔 중심지라 교회가 좋은 곳에 세워질 수 있었고 자연적으로 성도수 증가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 번은 교회당을 지으면 좋은 곳이라 알아보니 모펫 목사의 소유지였다. 모펫 목사를 찾아가 의논하면 "땅은 참 좋은데 내 그 땅을 팔지요. 사서 지으시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냥 쉽게 무료로 땅을 얻을 줄 알았던 구매자가 땅값이 나름 많이 올라 살 수 없을 것을 알고 실망을 하고 있는데 독촉을 하며 "문서를 씁시다. 그래야 소유를 넘기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터를 거래 가격에 살 만한 처지가 아니라 말없이 잠잠히 있는데 모펫 목사의 서기를 시켜서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매매계약서를 썼다. 찾아간 이는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는데 대금을 일금 몇 전이라 썼다고 한다. 너무 터무니 없이 싼 가격을 쓴걸 보고 어안이 벙벙하고 있는데 "내가 살 때의 그 값이요. 산 값으로 파는 겁니다"라고 말하여 매수자가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일화가 한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이런 일화도 있다. 모펫 목사가 평양의 요지에 사두었던 땅이 후에 값이 크게 올라 큰 값이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모펫 목사를 잘 모시던 신학교 서기로 일하던 문서기라는 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문서기를 찾아 "내 아무데 있는 땅을 문서기에게 팔려고 하는데 오늘 문서를 씁시다"라고 말하였다. 문서기가 "저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그 땅을 제가 어떻게 사요?"라고 대답하자 모펫 목사는 나는 그 땅은 꼭 문서기에게 팔려고 합니다. 종이 가져오세요. 문서로 계약합시다라며 막무가내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모펫 목사 자신이 손수 종이를 가져와 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내 시키는 대로 쓰시요"하면서 살 때의 그 가격으로 쓰라고 하더니 웃으면서 "그 값 내시요. 나는 산 값으로 문서기에게 팔려고 산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이 일로 문서기는 꽤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한국 교회 뿐 아니라 함께 일한 동역자들에게 영적인 부분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꽤 윤택한 삶을 살게 도와 주었다는 일화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모펫 목사는 그의 보수적인 신앙이 그대로 조선 땅에서도 실천되었다. 한달에 몇 번 고국에서 오는 편지조차 주일에는 우편물에 그대로 두고 만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성화조차 집에 걸어두지 않았고 마리아 상 같은 성상은 아주 혐오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성화나 성상이 카톨릭이 미혹하고자 조작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배척했다고 전해진다.

 

모펫 목사와 안익태

애국가를 작곡한 작곡자 안익태 선생은 숭실대학교 출신이다. 안익태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 되었는데 안익태 선생을 일본 경찰이 잡으려 하자 모펫 목사가 안익태 선생을 숨겨 주었고 그를 유럽으로 보내 주었다.

 

모펫 목사의 가족

모펫 목사는 원래 결혼했던 부인이 있었는데 부인을 사별하고 그의 처제와 결혼을 했다고 알려진다. 이 부인에게서 한국 신학 대학 원장으로 일하다가 프린스턴 신학 사학교수로 재직했던 마삼낙 목사와 대구 동산병원 설립과 운영에 큰 공헌을 한 마화일 의사가 태어났다. 그리고 모펫 목사의 두 번째 부인도 평양에서 헬라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행정 수행자

1907년 처음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인은 한석진(韓錫晉), 이기풍(李基豊), 길선주(吉善宙), 송인서(宋麟瑞), 방기창(邦基昌), 서경조(徐景祚), 양전백(梁甸佰)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가죽신에 버선을 신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또 졸업증서 상단에는 손에 든 횃불로 십자가를 비추는 한반도 그림이, 오른쪽에는 데살로니가전서 24, 왼쪽에는 요한복음 812절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다른 여러 교회 역사의 첫 면을 장식하는 인물이 되었고, 한국 기독교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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